바람둥이에게도 도덕은 있다. 도덕적 바람둥이라는 말은 없지만 바람둥이의 도덕은 있다. 이를테면 소설 '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'에 나오는 토마스는 한 번 만난 여자는 3주 후에나 만난다는 식의 도덕을 가지고 있다. 두 여자를 동시에 만나지 않는다는 놈도 있고 심지어는 한 침대에서는 오직 한 여자와만 섹스를 한다는, 얼핏 당연해보이는 규칙을 가진 놈도 내 주위에는 있다.
나는 아직까지 뭘 해야 되는지, 뭘 하지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개념이 부족하다. 그러다보니 내 인생은 언제나 무심결에 저지른 일들을 수습하는 데 바쳐졌다. 제작비를 감독이 좀 갖다 쓰는 게 왜 나쁜지 아직도 나는 납득하기 어렵지만 어쨌든 그 일 때문에 차를 팔아야만 했고, 선배의 마누라와 자다가 아닌밤중에 린치를 당하기도 했다. 신인들과 자고 다닌다고 욕하지만 내가 강간을 하 는것도 아니고 서로 좋아서 벌인 일에 대해서 왜 죄의식을 가져야 하는지 모르겠다. 물론 사정이 어려울 때는 그 여자들의 돈으로 지낸 적도 있지만 그것 역시 강도질도 아는데 왜 비난받아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.
나도 도덕적인 삶만이 순탄한 인생의 동반자라는 걸 잘 알고 있다. 그러나 예술가의 삶이 어찌 범인의 그것과 같으랴. 우리 예술가들은 위반을 통해서 배우고 고난을 딛고 성숙하는 존재들이다, 이거지.
- 김영하, <너의 의미>
<너의 의미>는 김영하의 소설집 <오빠가 돌아왔다>에 실린 단편이며, 이 소설집에서 가장 웃기는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다. 아무래도 작가 김영하는 이 소설을 쓰면서 스스로도 키득거리지 않았을까. 자기가 만들어 낸 캐릭터를 바라보며 '아 이자식 되게 웃기네' 하는 거다. 가수도 스스로를 감동시키는 노래를 불러야 한다지. 청자들은 느낄 수 있다. 진짜 감동하면서 부르고 있는지. 나도 느낄 수 있었다. 소설가도 스스로 재밌어하면서 이 소설을 쓰고 있었다는 것을.
김영하의 말투 중 하나가 '변명하는 말투' 비슷한 게 있다. 아주 조금의 오해라도 피해가고 싶지 않은 성격, 혹은 디테일한 부분을 끄집어내 묘사하고 싶어하는 그런 마음이 드러나는 듯 한데, 가끔 그 말투는 "자기 합리화를 위한 변명" 의 기능도 여실히 해 낸다. 바로 위의 부분과 같이. 도덕적으로 비난받는 스스로를 변호하기 위해 도덕의 개념은 상대적으로 변할 수 있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다. 사람들마다 도덕의 잣대가 다르다고, 내가 생각한 도덕의 범위 내에서 이건 정당한 일이라고. 왜 나쁜 일인지 자긴 도무지 모르겠다고 말하면서 '사실 난 아직 개념이 부족하다'라고 슬쩍 자기고백도 꺼내놓는다. 그러다가 결국 '난 예술가니까, 예술가의 삶이란 이런거야' 라고 마무리.
물론 이 소설의 반전(?)은 '이런 쓰레기같은 예술가'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나타났다는 것이다. 쓰레기를 위해 소설가가 준비한 이 멋드러진 복수라니. 정말 끝까지 웃긴다.

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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